미국은 달러를 엄청나게 많이 발행해 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물건은 흔해질수록 가격이 떨어지는데, 
달러는 세계 곳곳에 넘쳐나면서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돈으로 사용된다.

물을 생각해 보자. 
물은 생명에 꼭 필요하지만 흔한 곳에서는 비싸지 않다.

반대로 사막에서는 한 병의 물도 귀해진다. 

결국 어떤 물건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뿐 아니라, 
얼마나 공급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원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달러를 계속 공급하면서도 
달러의 가치를 지킬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의 중심에 바로 트리핀 딜레마가 있다.

금본위제에서는 돈을 마음대로 만들 수 없었다

과거에는 달러를 일정한 양의 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를 금본위제 또는 금환본위제라고 한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금 1온스의 
가격이 35달러로 정해져 있었다.

쉽게 말해 달러는 금을 맡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보관증과 비슷했다. 

은행 창고에 금이 100개 있다면, 
금 100개에 해당하는 돈만 발행해야 
사람들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금은 종이처럼 공장에서 찍어낼 수 없다. 

경제가 성장해 달러가 더 많이 필요해져도 
금의 양이 늘어나지 않으면, 
미국은 달러를 무한정 공급할 수 없었다.

금은 그대로인데 달러만 두 배로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달러 한 장으로 살 수 있는 금의 양은 줄어든다.
다시 말해 달러의 가치가 하락한다.

이것은 피자를 떠올리면 쉽다. 

피자 한 판을 네 조각으로 나누면 한 조각이 크지만, 
같은 피자를 열 조각으로 나누면 한 조각은 작아진다. 

피자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조각을 표시한 숫자만 늘어난다고
 음식의 양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금본위제에서 금은 피자였고, 
달러는 피자를 나눈 조각에 가까웠다. 

달러 발행량만 늘린다고 
실제 부가 저절로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금 대신 ‘달러 수요’를 선택했다


1971년 미국은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제도를 중단했다. 

이른바 닉슨 쇼크다. 

이때부터 달러는 금과 직접 연결된 돈이 아니라, 
사람들의 신뢰와 수요에 따라 가치가 움직이는 돈이 됐다.

여기서 미국이 선택한 트리핀 딜레마 해결 방법이 등장한다.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달러 공급이 증가하는 만큼, 
달러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국가도 늘리면 된다.

어떤 회사가 장난감을 두 배로 생산했다고 생각해 보자. 
사고 싶은 아이는 그대로인데 장난감만 많아지면 가격은 떨어진다. 

하지만 장난감을 원하는 아이도 
두 배로 늘어난다면 가격은 유지될 수 있다.

달러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달러를 많이 발행하더라도 
전 세계가 무역, 투자, 저축, 원자재 결제에 달러를 필요로 한다면
달러의 가치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공급만 늘어나면 가치가 떨어진다. 

그러나 공급과 함께 수요가 증가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국은 금을 더 캐는 대신, 
세계가 달러를 더 많이 사용하도록 만드는 길을 선택했다.

달러는 어떻게 세계의 필수품이 되었을까?

국제 무역에서는 서로 믿을 수 있는 공통 화폐가 필요하다. 

한국 기업이 브라질 기업과 거래할 때 
원화와 헤알화의 가치를 매번 계산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모두가 인정하는 달러를 사용하는 편이 편리하다.

석유와 주요 원자재 거래에서도 달러가 널리 사용됐다. 

각국 중앙은행은 외환위기에 대비해 달러를 보유했고, 
기업과 금융기관은 국제 대출과 투자에 달러를 활용했다.

달러로 거래하는 나라가 늘어날수록 달러는 더 편리해졌다. 

편리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달러를 사용했다. 
휴대전화 메신저와 비슷하다. 

기능이 아무리 좋아도 사용하는 사람이 한 명뿐이면 쓸모가 작다. 
하지만 주변 사람이 모두 같은 메신저를 쓰면 쉽게 다른 서비스로 옮기기 어렵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네트워크 효과라고 부른다. 
달러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세계 경제가 함께 사용하는 거대한 결제망이 된 것이다.

돈의 가치는 누가 정할까? 당백전과 스위스 디나르


돈은 정부가 만들지만, 그 가치를 정부 혼자 정할 수는 없다. 

조선 후기의 당백전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당백전은 이름 그대로 기존 동전 100개의 
가치가 있다고 표시한 돈이었다. 

하지만 동전에 들어간 실제 재료의 가치는 
기존 화폐의 5~6배 수준에 불과했다. 

정부는 경복궁 중건 등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당백전을 대량으로 발행했지만, 사람들은 동전에 적힌 숫자만큼의 가치를 믿지 않았다.

시중에 돈은 빠르게 늘었지만 
상품과 생산량은 그만큼 증가하지 않았다. 

결국 화폐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크게 올랐다. 

당백전의 사용이 중단된 뒤에야 물가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숫자를 100이라고 적는다고 실제 가치가 100배로 커지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반대편에는 이라크의 스위스 디나르라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이름만 보면 스위스 화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걸프전 이전 이라크에서 사용되던 옛 지폐를 가리킨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 정부는 
이 옛 지폐의 사용을 인정하지 않고, 
사담 후세인의 얼굴이 들어간 새로운 디나르를 발행했다. 

하지만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계속 옛 지폐인 스위스 디나르를 사용했다.

놀라운 점은 이 돈을 새로 발행해 주는 중앙은행도 없고, 
정부의 공식적인 보증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낡거나 훼손된 지폐가 생겨도 
새 지폐로 바꿔줄 기관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위스 디나르를 
물건을 사고파는 돈으로 받아들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함부로 돈을 더 찍어낼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스위스 디나르의 공급량은 거의 늘어나지 않았지만, 
이라크 남부에서는 사담 디나르가 대량으로 발행됐다. 

그 결과 사담 디나르의 구매력은 계속 하락했고, 
공급이 제한된 스위스 디나르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치를 유지했다.

여기에 언젠가 이라크에 새로운 정부와 
화폐제도가 들어서면 스위스 디나르의 가치가 인정될 것이라는 기대도 작용했다. 

실제로 2003년 이라크 화폐가 통합될 때 
사담 디나르는 새 디나르와 1대1로 교환됐지만, 
스위스 디나르 1장은 새 디나르 150장으로 교환됐다.

당백전과 스위스 디나르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백전은 정부가 가치를 높게 선언하고 많은 양을 발행했지만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반면 스위스 디나르는 발행하는 정부조차 사라졌지만, 
공급이 제한되고 사람들이 계속 사용하면서 가치를 유지했다.

결국 돈의 가치는 종이에 인쇄된 숫자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돈을 다른 사람이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 
함부로 공급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 앞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 나온다.

달러 패권의 진짜 비밀

미국이 트리핀 딜레마를 완전히 없앴다고 보기는 어렵다. 

달러를 지나치게 많이 공급하면 인플레이션이나 
신뢰 하락이 나타날 수 있고, 공급을 줄이면 세계 금융시장이 흔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관리해 왔다. 
금의 공급량을 늘린 것이 아니라, 달러가 필요한 경제 구조를 확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돈의 본질은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돈은 많이 찍는다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고, 믿고, 사용해야 강해진다.

달러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초록색 종이가 아니었다. 
세계가 달러를 중심으로 거래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미국이 선택했던 트리핀 딜레마 해결 방법은 
새로운 금광을 찾는 일이 아니라, 달러를 원하는 세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경제를 바라볼 때는 “돈을 얼마나 발행했는가”만 봐서는 부족하다. 

그 돈을 누가 필요로 하는지, 왜 보유하려 하는지, 
신뢰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돈의 가치는 인쇄기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와 믿음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