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대는 동아시아 역사의 거대한 지각변동이 수면 위로 완전히 드러난 시기였습니다. 1860년대에 두 나라가 내렸던 첫 판단의 결과가 불과 10년 만에 엄청난 격차로 돌아온 것입니다. 처음 역사를 접할 때는 두 나라의 사건을 따로따로 외우기 쉽지만, 사실 이 시기 일본의 급진적인 변화와 조선의 강제 개항은 하나의 거대한 사슬처럼 묶여 있었습니다. 일본이 내부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밖으로 눈을 돌린 결과가 바로 조선의 문을 흔든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1. 일본의 1870년대: 메이지 유신의 폭주와 내부의 안개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정권을 잡은 일본의 신정부는 187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그야말로 국가의 모든 것을 갈아엎기 시작했습니다. 신분제를 폐지하고, 토지 제도를 개혁했으며, 서구식 징병제를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이 급격한 변화가 모두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평생 칼을 차고 지배 계급으로 군림하던 무사(사무라이)들은 하루아침에 직업과 특권을 잃고 몰락했습니다. 농민들 역시 근대화 비용을 대기 위한 무거운 세금 때문에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메이지 정부가 눈을 돌린 곳이 바로 해외였습니다. 내부의 불만과 폭발 직전의 에너지를 밖으로 분출시키지 않으면 정권이 무너질 위기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었습니다. 비록 정부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정한론이 당장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일본 지배층은 한 가지 확실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신들이 미국에 당했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여 조선을 침략하고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2. 조선의 1870년대: 권력의 교체와 흔들리는 빗장
같은 시기 조선 내부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1873년, 난공불락 같았던 흥선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왕이 직접 정치를 마침)을 시작했습니다.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난 고종과 그의 비인 명성황후 여흥 민씨 세력은 대원군의 무조건적인 폐쇄 정책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조선 내부에서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박규수, 오경석 같은 일부 선구적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서양의 기술을 무조건 막을 것이 아니라, 우리도 통상을 통해 실리를 챙겨야 한다"는 통상개화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세계 정세의 흐름을 읽는 정밀한 정보망이 부족했습니다. 일본이 서구식 군함과 제도를 갖추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하지 못했습니다. 문을 열 준비를 주도적으로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내부 권력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대외 정책의 방향성이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3. 운명의 1876년, 강화도 조약이라는 첫 단추
일본은 조선의 이러한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1875년, 일본은 근대식 군함인 운요호를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시켜 도발을 감행했습니다(운요호 사건). 영종도를 포격하고 약탈한 일본은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며 조선에 책임을 묻고 개항을 요구했습니다. 본인들이 20여 년 전 미국의 페리 제독에게 당했던 '함포 외교'를 그대로 복사해서 조선에 써먹은 것입니다.
결국 1876년, 조선은 일본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체결하게 됩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동시에 '불평등 조약'이었다는 점입니다.
조약 제1관에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라는 문구가 들어있었습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이 문구를 보고 "일본이 우리를 존중해 주는구나"라며 안심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철저한 기만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 종주권을 주장하던 청나라의 간섭을 차단하여, 향후 일본이 조선을 독점하기 위한 외교적 밑작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해안 측량권과 치외법권(일본인이 조선에서 죄를 지어도 조선 법으로 처벌하지 못함) 같은 치명적인 독소 조항들이 그대로 통과되었습니다.
4. 첫 단추의 방향성이 초래한 비극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 열강의 '외교적 문법'을 빠르게 습득한 일본은 철저하게 강자의 논리로 조약을 주도했습니다. 반면, 근대적 조약이 무엇인지, 국제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조선은 눈앞의 무력 위협을 피하기에 급급해 국가의 이권을 너무나 쉽게 내주었습니다.
이 1870년대의 만남은 양국이 대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침략자'와 '피해자'라는 비극적 관계로 접어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문을 열더라도 어떻게 주도권을 쥐고 열어야 하는지 준비되지 않았던 조선의 첫 단추는, 이후 걷잡을 수 없는 국력의 격차로 이어지게 됩니다.
📌 2편 핵심 요약
일본의 메이지 유신 부작용: 급격한 근대화로 내부 무사 계급의 반발이 일어나자, 이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정한론'과 조선 침략 카드를 꺼내 듦.
조선의 정권 교체: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으로 개항에 대한 여지가 생겼으나, 국제법과 세계 정세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음.
강화도 조약의 실상: 일본의 함포 외교에 밀려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자주국' 선언 속에 청나라 간섭 배제라는 일본의 고도의 침략 의도가 숨겨져 있었음.
다음 편 예고 (3편)
다음 3편에서는 개항 이후 조선 내부에서 일어난 격렬한 사상적 사투를 다룹니다. 전통 유교 체제를 끝까지 사수하려던 '위정척사파'와 문명을 통째로 바꾸려던 일본의 '문명개화론'이 양국의 사상적 토대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비교해 보겠습니다.
💬 만약 강화도 조약 당시 조선에 국제법을 잘 아는 외교 전문가가 있었다면 독소 조항들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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